Deep Dive · 기독교 변증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 구원의 원리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 논리적이고 법적인 — 기독교 구원의 구조를 완전히 파헤쳐 봅니다

12분 분량 · 심화 변증

기독교의 가장 핵심 교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사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설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것은 기독교의 심장부적 교리입니다. 그런데 정작 많은 사람들이 — 신자든 비신자든 — 십자가와 부활이 어떤 원리로 인간을 구원하는지 잘 모릅니다.

01 왜 이 질문이 중요한가

많은 회의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불공평하고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이렇게 묻습니다.

"극악무도한 살인자도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국에 가고, 평생을 착하게 살았어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인간의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기독교의 구원관을 법적 구조로 이해하신다면, 세상의 어떤 다른 종교의 교리보다 기독교가 논리적이고 법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어떤 의미와 영적 원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단계별로 차근차근 풀어보고자 합니다.

02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것

거의 모든 종교는 한 가지 공통된 가르침에서 출발합니다 — 인간은 죄인이다.

가장 극단적으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조차도 그렇습니다. 맹자는 사람이 본래 선하게 태어났다고 했지만, 그의 주장 자체가 "그렇다면 왜 인간은 악을 행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습니다. 맹자는 인간의 악행을 "원래의 선한 본성이 더럽혀져 생기는 죄"로 설명하고, 학문으로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쳤죠.

다른 종교들은 어떻게 가르칠까요?

불교
자신이 지은 죄가 업보(業報)가 되어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치며, 윤회를 거듭하면서 스스로 도(道)를 깨달아야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탈(혹은 열반)에 이를 수 있다.
힌두교
이 세상에서 카스트의 의무인 다르마(dharma)를 다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다시 윤회의 굴레에 갇혀 환생한다.
이슬람교
죽은 후 사람이 지은 선과 악을 저울에 달아 더 무거운 쪽으로 운명이 정해진다. 알라를 위한 순교는 천국 입성에 큰 공로로 여겨진다.
유교
수신(修身)을 통해 인격을 닦고 인(仁)을 실천함으로써 군자(君子)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공통된 패턴이 보이시나요? 모두 "내가 노력해서 죄에서 벗어난다"는 자력 구원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도덕적 개선이나 공덕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03 선행이 죄를 상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자력 구원관은 합리적일까요?

1937년 도쿄니치니치신문이 보도한 백인참 경쟁 기사
1937년 12월 13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난징 학살 당시 두 일본군 장교(向井敏明·野田毅)의 "백인참(百人斬り) 경쟁"을 보도한 기사다. 두 장교는 종전 후 전범 재판에서 사형되었다. — 인간 사회는 단 한 건의 살인도 결코 정의를 거스른 것으로 본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평생 100명의 목숨을 살렸지만, 그 중 1명을 살해했다고 합시다. 99명을 살렸다는 공로가 있으니, 그 한 건의 살인은 면제될까요?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법원도 "당신은 99명을 살렸으니 한 번의 살인은 없던 것으로 합시다"라고 판결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평생 살인도, 강도도, 절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한 번 사기를 쳐서 징역을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범법자일까요, 아닐까요?

당연히 범법자입니다. 범법자는 "모든 법을 다 어긴 사람"이 아니라, "법 하나라도 어긴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의 법 체계 자체가 그렇게 작동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경은 정확히 같은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모든 것에서 유죄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께서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이제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야고보서 2:10–11

다른 종교들이 가르치는 "공덕 쌓기 구원"은 사실 인간이 일상에서 통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의관과조차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구원관이야말로 법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04 기독교가 다른 답을 하는 이유

모든 종교가 "스스로 구원하라"고 말할 때, 기독교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단언합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 로마서 3:20

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는 의로운 것이 무엇인지조차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확히 무엇을 하러 오신 것일까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0:28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代贖物)"로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대속물이 무엇일까요?

05 100억 비유 — 대속의 구조

이 개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풀어보겠습니다.

담배꽁초와 100억 빌딩

어느 날 한 사람이 담배를 피우며 가다가 무심코 꽁초를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꽁초가 100억 원짜리 고층 빌딩을 태워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무직이라 한 푼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100억 원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하지만 능력이 없으니, 감옥에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부자가 그를 불쌍히 여겨 "내가 100억을 대신 갚아주겠다. 계좌번호만 알려달라"고 합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그저 계좌번호를 알려주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난 100억을 갚을 필요가 없어"라고 생각하거나 "저 사람은 사기꾼일 거야"라며 계좌번호를 안 주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그대로 감옥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히 인간이 처한 상황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짓고, 죄의 댓가는 사망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값을 스스로 치를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살아갈수록 죄만 더 쌓일 뿐입니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인류의 죄값을 치를 능력이 있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고,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는 죄의 댓가, 즉 사망을 이길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분의 생명을 받기만 한다면 — 계좌번호를 알려주듯 —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만약 "나는 지옥에 갈 사람이 아니야"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나를 구원할 수 없어"라며 그 생명을 거부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06 십자가의 진짜 고통

우리가 우리의 죄의 댓가를 치르지 않는 대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댓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죄의 댓가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십자가의 가장 깊은 고통은
못 박힘이 아니라 단절이었다.

저는 죄의 댓가가 예수님께서 받으신 물리적 십자가 고통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잔인한 로마식 형벌이 끔찍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받으신 죄의 댓가의 전부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피처럼 흘리시며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을 때, 저는 예수님이 단지 십자가의 물리적 고문이 두려워서 그런 기도를 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 —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영원 전부터 한 번도 끊어진 적 없는 성부와 성자의 완벽한 사랑의 관계가, 우리의 죄로 인해 끊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셔야 했습니다(마 27:46).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 우리가 치러야 할 모든 댓가를 — 독생자 예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하셨던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이사야 53:4–5

휘장이 찢어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고 운명하시자, 성전에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마 27:51).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전의 휘장은 지성소(至聖所)와 성소를 가르는 막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으로,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공간이었죠.

그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 결코 인간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찢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죄의 벽이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07 부활 — 구원이 완료되었다는 증거

빈 무덤에서 걸어나오시는 예수 — 부활의 아침
빈 무덤에서 걸어 나오시는 예수. 부활은 "죄값이 완전히 치러졌다"는, 하늘이 인류에게 발행한 영수증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정말로 인류의 죄값을 다 치르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매달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는다"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저 혼자 쇼를 하고 죽은 것인지, 정말로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하고 죽은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변증적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 고린도전서 15:17–19

바울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압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죄의 댓가가 완전히 치러졌고, 사망의 권세가 부서졌다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멸망 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26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이 패배했음을 선언하며,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분 덕분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것이라는 확실한 약속이 됩니다.

08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방법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하더라도, 내가 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이 모든 소식은 나에게 무의미합니다. 100억 비유로 돌아가 봅시다 — 부자가 100억을 갚아준다 해도, 내가 계좌번호를 주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맡길 수 있을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라디아서 2:20
1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기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가 사실은 내가 졌어야 할 십자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표현합니다.

2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예수님께서 그 피로 우리를 사셨으므로, 우리의 주인은 이제 더 이상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 우리의 부족한 의(義)가 아니라 예수님의 완벽한 의 — 우리가 절대 살아낼 수 없는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그분의 의로움 — 이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우리는 그제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09 이벤트가 아닌 법적 구원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단순한 종교적 이벤트가 아닙니다. 그것은 명확한 법적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처벌을 받으셨습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몸을 밤새도록 나무 위에 두지 말고 반드시 그 날에 그를 묻어서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니라.)" 신명기 21:23

그 어떤 저주도 받으실 이유가 없는 — 그 어떤 죄도 없으신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끔찍한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는 분명한 법적 목적을 지니고 전가된 처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기에 충분한 무한한 거룩함을 갖고 계셨기에, 죄값을 다 치르신 후에는 더 이상 지옥에 머무를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망을 이기셨다"라고 표현합니다.

맺음말

십자가와 부활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법적이고 논리적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믿음으로 그 승리를 내 것으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지 않으시겠습니까?